Research Institute for Cultural Territory가석문화영토 연구총서

Published Volumes

Books published in the Gaseok Cultural Territory Research Series by the Research Institute for Cultural Territory.

홍일식의 ‘문화영토론’을 다시 읽다
가석문화영토연구총서 1

문화 대국의 꽃, 한류:홍일식의 ‘문화영토론’을 다시 읽다

박치완 著

발행처
(재)문화영토연구원
발행일
2025년 4월
ISBN
979-11-991690-0-5
정가
23,000원

책 소개

“문화영토는 (…) 천하에서 가장 넓은 땅이며 (…)
모든 민족과 국가를 포옹하고도 모자라지 않은 영토이며,
배타적으로 경쟁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는
가치의 영토이다.”

– 홍일식

“홍일식의 소위 ‘글로컬 문화영토론’은
세계학계에서 2000년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한 ‘문화의 세계지역화(glocalization of culture)’
논의보다 시기적으로도 반세기 정도 앞선다는 점에 그 선도성을 평가할
필요가 있으며, 문화인식론의 차원에서도 1980년대 초에 이미
이와 같은 시대를 앞서가는 이론을 제안했다는 것은
홍일식의 혜안과 국량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 본문 중에서
발간사

지난 2019년 10월, (재)문화영토연구원은 가석(可石) 홍일식(洪一植) 박사님께서 기부하신 사재를 바탕으로 설립되었습니다. 가석 선생은 1981년 우리 학계에 ‘문화영토론’을 처음 주창하시면서 한국의 문화적 가치와 특성이 다툼과 분열을 줄이고 세계인이 함께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원자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중한대사전 편찬이라는 역사적 대 과업을 수행 중이어서 ‘문화영토론’을 학술적으로 발전시키는 체계적 노력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초, 한국어만 가르쳐도 먹고살 수 있는 시대가 온다는 신념으로 설립했던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의 ‘한국어문화연수부’가 오늘날 매년 1만여 명의 외국인들이 고려대를 찾아 한국어와 문화를 배우는 한국 문화의 전당으로 자리잡은 것만 보더라도 선생의 문화영토론이 허황된 생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국권을 상실한 지 두 갑자(甲子)를 지나면서 이제 대한민국은 세계사의 주역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1960대 초부터 시작된 경제개발과 1980년대 중반 마침내 달성한 정치적 민주화가 오늘날 대한민국을 이처럼 부강하게 만들었지만, 흔히 말하는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신문화가 기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은 경제와 과학기술만이 아니라 우리의 민족문화에 바탕을 둔 한류의 세계화도 큰 몫을 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석 선생이 처음 문화영토론을 우리 학계에 제시하신 지 45년이 지난 오늘날, 세계인은 한국과 한국인,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이해하고 배우며 나아가 열광하고 있습니다. ‘한류’로 불리는 ‘K-Culture’는 바로 일찍이 선생이 생각하고 꿈꾸던 문화영토 현상의 현실적 모습입니다. 우리 문화의 특수성, 특히 관념문화로서의 ‘효’ 사상은 규범문화인 중국의 유교적 ‘효’ 개념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현상이며, 우리 민족문화에 바탕을 둔 효 사상이야말로 인류를 평화공동체로 이끌 고귀한 사상이요, 철학입니다. 이러한 효 사상을 비롯해 다양한 우리의 문화적 소재들이 활용되고 그 가치를 세계인이 공유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세계인들이 한국의 문화콘텐츠를 즐기고, 한국산 화장품이나 음식을 좋아하며, 한국 방문을 원하고 한국 사람과의 교류를 바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여러 분야에서 많은 선각자들이 한국 문화를 원자재로 삼아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문화의 꽃을 피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온 결과입니다. 새삼 선생의 선견지명에 다시 한번 감탄해 마지않습니다.

그러나 세계인들이 한류를 좋아하고 배우려는 것과 함께 한국과 한국 문화에 대한 시기와 질투, 혹은 두려움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한류 현상이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일부 국가에서는 혐한 현상도 나타나 한류의 세계화가 오히려 불화와 갈등의 원인이 되는 위험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자연의 이치와 마찬가지로 문화도 수준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화영토 현상은 결코 제국주의처럼 일방적 침투 현상이 아닙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우리가 서양 문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오히려 이를 적극 수용해 우리 고유의 문화와 서구 선진국의 문화를 융복합시켜 오늘날 한류로 발전한 것을 보더라도 문화영토는 특정 지역문화의 세계화만이 아니라 세계 문화의 지역화가 상호작용을 하면서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두가 함께 즐기고 공유하는 ‘문화영토’ 현상의 주체는 한국과 한국인만이 아니라 세계인이며, 전 인류가 지향하는 보편적 가치인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자는 것이 곧 ‘문화영토론’의 요체입니다.

지난 5년간, 우리 연구원은 ‘문화영토’를 주제로 한 많은 학술 연구와 활동을 지원해 왔습니다. 매년 두 차례에 걸친 학술회의를 개최 또는 지원해 왔으며, 학술지 「문화영토연구」를 창간해 ‘문화영토’를 주제로 한 학술논문을 게재해 왔습니다. 이 학술지는 2023년, 한국연구재단의 등재후보지로 선정되어 연구자들의 귀한 연구 결과를 학계에 내놓고 있습니다. 또 2024년에는 연구원 창립 5주년을 맞이하여 이를 기념하고, 동시에 설립자 가석 선생의 작고 1주기를 추모하는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해 세계 문화영토 연구의 본산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습니다.

2023년, 우리 연구원은 기존의 학술지원 활동에 더해 단행본 성격의 ‘가석문화영토연구총서’를 발간하기로 하고, 그 첫 번째 수혜자로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박치완 교수를 선정하였습니다. 이번에 발행된 총서 제1호는 특히 지난 1년 6개월 간 박치완 교수가 우리 연구원의 설립자이신 가석 홍일식 선생의 저작에 나타난 ‘문화영토’의 개념과 철학, 학문적 확장성을 연구한 결과를 집대성한 것으로 향후 ‘문화영토’ 현상을 연구하는데 이정표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연구원은 설립자의 뜻을 받들어 앞으로도 한류와 문화영토 연구를 지원하고 발전시키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재)문화영토연구원 이사장  홍 성 걸

프롤로그

하늘을 찌르는 경계의 벽들을 ‘문화’로 감싸 안을 수만 있다면…

영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국민이 존재하느냐고 물을 수조차 없다. 영토권은 한 국가가 국가로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개인의 자유도 주권도 영토권이 보장된 국민에게만 부여될 수 있다. 공동체 구성원의 삶의 지평이자 무대인 영토의 중요성은 이런 점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오늘과 같은 탈영토·탈경계의 시대에 역으로 ‘영토 전환적 사고’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토-국민-국가는 ‘하나의 생명체’와 같다. 국권의 수호도 민권의 신장도 모두 영토 위에서 요구되고 영토 위에서 실천되는 권리이다. 일찍이 홍일식은 「文化領土 時代의 到來와 韓國文化의 展望」에서 제 문화의 가치를 망각하고 외래의 식민지 이론에 넋이 빠져 방향성 없이 갈팡질팡하는 대한민국의 지식인들을 겨냥해 “민족문화에 대한 지식인의 대오각성과 분발”이 필급(必急)한 때라고 강조하면서 “민족의 문화영토가 지닌 역사”를 망각한 국민에게는 식민의 역사만이 반복될 뿐이라 경고한 바 있다.

홍일식은 정치영토, 경제영토가 아닌 ‘문화영토’가 견고해야만 자국의 경계들을 부수고 자국의 영토 내로 권력을 장악해 들어오는 부정의·불평등한 외부 패권에 맞설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문화영토는 배타적 정치영토, 경제영토와 달리 모든 개별문화의 독자성, 특수성을 인정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인류문화를 하나로 창조하는 데 이상(理想)을 둔다.

홍일식의 문화영토론이 단순한 국수주의나 문화적 제국주의 등과 구별되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홍일식은 개별 로컬 문화가 중심이 된 새로운 ‘세계문화론’을 그의 문화영토론으로 구상하고 그 비전을 지구촌 전체 시민을 향해 피력한 것이다.

이 책의 구성은 이상과 같은 홍일식의 문화영토론을 『文化領土時代의 民族文化』(1987), 『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 21세기 인류문명의 주역이 되기 위한 한국인의 자기 점검』(1996), 『문화대국으로 가는 길』(2017)을 중심으로 해서 그 이론적 깊이를 현대적 의미로 재구성한 것이다. 전체 내용은 총4부로 구성돼 있으며, 그 내용은 아래 요약한 것과 같다.

제1부, 〈영토 개념의 재고와 홍일식의 문화영토 개념의 함의〉에서는 영토 전환적 사고, 문화영토, 인본주의, 세계시민론을 키워드로 삼아 홍일식의 문화영토론을 인류 공동문화의 창조에 초점을 맞추어 새롭게 해석하고, 그 사상적 지향이 인본·민본주의로서 세계시민론에 있음을 밝혔다.

제2부, 〈세계시민주의의 창으로 재평가한 홍일식의 문화영토론〉에서는 1부에서의 논의를 조금 더 확장해 현대의 소위 ‘야만적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제시한 대안적 세계화, 신인본주의와 같이 최근 들어 전 세계 지식계를 달구고 있는 주제들과 연결해 홍일식의 문화영토론은 기본적으로 ‘지구공동체’를 인본주의적으로 재건하려는 문화론이기에 “‘문화적’ 세계시민주의”이면서 동시에 “신인본주의적 ‘세계시민주의’”라는 점을 강조해 보았다.

제3부, 〈홍일식의 민족 문화론과 한국문화의 ‘지역-세계성’과 ‘특수-보편성’〉에서는 민족문화, 지식의 식민화와 탈식민화, ‘다른 보편주의’, 한국적 특수성, 세계적 보편성을 화두로 삼아 문화영토론의 뿌리가 한국의 민족-전통문화의 복원에 있고, 이를 토대로 한국문화가 갖는 세계적 보편성에 대해 설명해보았다.

마지막 제4부에서는 〈홍일식의 효(孝) 담론과 ‘우리-공동체’의 보편적 실천 윤리〉라는 제하(題下)에 대한민국에서 오늘날 실천되고 있는 효는 중국의 공맹(孔孟)에 그 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고유의 전통으로서 지구촌 시민들이 “‘사랑’으로 한 가족”이 되는 것이 효의 궁극 지향이라는 점을 밝혔다. 효를 통한 인류 공동문화 창조에 홍일식의 효 담론의 핵심이 있기에 우리는 그의 효론을 보편적(세계적) 윤리라 평가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홍일식은 우리가 본 연구의 주 분석 텍스트로 삼은 3권의 저서 곳곳에서 일관되게 문화는 ‘평화지향적’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문화’를 통해 세계 평화를 앞당기고, 인류 구원의 대도(大道)를 정치, 경제가 아닌 문화로 실천해 보자는 것이 홍일식의 문화영토론의 궁극 목표라는 것을 단적으로 방증한다. 홍일식의 문화영토론은 영토가 문화로 꽃피고, 문화가 영토에 스며들 때 완성된다. 영토가 문화로 꽃피고, 문화가 영토에 스며든 지구촌, 지구촌이 만일 이와만 같이 ‘문화’를 모태로 해서 인본주의적 공동체로 거듭난다면, 지구촌 시민들에게 삶은 안정과 평화로, 가정은 사랑과 행복으로, 사회는 정의와 관용으로 넘쳐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 국제 사회를 지켜보노라면 적대적 경계의 벽들이 하늘을 찌르듯 치솟아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국가들 간의 불평등은 가속화되며, 문화적 차별 또한 심해질 것이다. 홍일식은 이런 상황에서는 ‘인간’이 본래의 얼굴을 가질 수 없다고 강조한다. 세계화 시대의 화두는 ‘오직 자본 이득’이며, 그래서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신인본주의를 지향하는 홍일식의 문화영토론이 갖는 대안적 세계화로서의 의의와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시 인류’를 연구하는 것”에서 그의 문화영토론이 포문을 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홍일식의 시대를 앞서가는 비전이 돋보인다고 하겠다. ‘인류 평화론’과 ‘인류 행복론’을 두 축으로 하는 홍일식의 문화영토론은 ‘대한민국’이라는 지리적 경계를 초월해 전 세계에 전쟁, 대결, 분쟁 대신 평화, 타협, 협상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온 인류가 ‘문화’로 한 가족이 되는 날을 필자도 학수고대하고 이 연구를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다.

이 책에 실린 4편의 논문은 각각 『문화영토연구』 제4권 2호, 제5권 1호 및 2호, 『동서철학연구』 제111호에 게재된 것으로 (재)문화영토연구원이 후원하는 〈가석문화영토연구총서〉 저술 지원사업 (2023. 07. 03 ~ 2024. 08. 30)의 연구 결과물이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지원사업 기간 동안 간간히 메모해 둔 것들을 바탕으로 최종보고서 제출을 전후해 정리한 것이다. 모든 글은 앞서 언급한 홍일식의 3권의 주저를 바탕으로 전개된 것이라서 인용이 중복된 경우도 다소 있으며, 각주 처리 방식이 통일되지 않은 곳도 눈에 띌 것이다. 집필 시기와 학회지 규정이 서로 다른 것이 원인이니 이점을 감안해서 독서해 주셨으면 한다.

저술 지원사업 계획서를 제출하고 지원사업에 선정되었을 때만 해도 홍일식 선생님은 필자와 같은 하늘 아래 계셨는데 이제는 필자의 이 졸작마저도 보여드릴 수 없는 다른 하늘에 계신다. 심히 아쉽고, 또 직접 뵙지 못한 것이 못내 유감스럽다. 선생님의 옥고를 읽을수록 필자는 그 폭과 깊이에 감동했고, 국학, 한국학 연구를 하시면서 이 땅의 ‘소금’이 되시기를 작정하고 꿋꿋하게 살아온 심해(深海)와 같은 선생님의 열정도 헤아릴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필자에게 국학, 한국학에 대한 애정을 갖게 해주신 선생님께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할 따름이다. 선생님의 가르침은 필자가 40여 년을 공부한 서양철학이 한 줌의 가치도 못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셨다.

이제는 ‘흙으로 돌아가 조국(祖國)이 되신’ 선생님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필자의 마음을 선생님께서 지사(志士), ‘매운 선비’, ‘보기 드문 거인’, ‘청학(靑鶴)을 타고 다니던 신선(神仙)’으로 흠모하셨던 조지훈의 시 구절 일부를 가슴에 새기며 서문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한 치의 國土를 지키기 위해서
한 사람의 목숨이 사라진다.

그 피가 스며드는 메마른 黃土,
아 우리의 祖國이여!

(…)
흙으로 돌아간 우리 뼈는
그대로 祖國의 거름이 되리라.

榮光 있거라 祖國이여

아! 내 어머니 나라여
아내와 아들딸의 나라여
벗과 스승의 나라여!
(〈告別 – 戰歿者가 부르는 노래〉에서)

세종대왕 탄신 627돌 날
이문동 연구실에서
박치완